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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대로키워라] 세계 무대를 압도한 존재감 - 베이스 연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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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임종관 | 사진 제공. JCC | 2016년 9호 

 

흙냄새 풀냄새 풀풀 나는 어린 시절을 보낸 소년. 역설적이게도 이 소년은 세계 최정상 베이스 성악가가 된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런던 코벤트가든 로열오페라 등 성악가들이 동경하는 무대에 단골로 서는 그. ‘바그너의 성지’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매년 구애하는 성악가, 연광철이다.

 

연광철을 키운 시원(始原)의 풍경

 


 

태어나 보니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충주의 벽촌(僻村)이었다. 어린 연광철은 지게를 지고 산으로 땔감을 구하러 다녀야 했고, 커다란 고개를 세 개나 넘는 이십 리를 걸어 학교에 다녔다. 보릿고개를 비켜가지 못해 배를 주린 적도 많았다. 그런 연광철의 곁을 지킨 건 음악이었다. 농사짓는 아버지가 즐겨 불었던 하모니카와 퉁소 소리, 하굣길 무서움을 떨치기 위해 불렀던 노래는 가슴속에 들어 앉아 작은 불씨를 지피기 시작했다. 


“노래를 좋아했어요. 초등학교 때 합창단 활동을 했는데 산골 초등학교 합창단이라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을 배울 수 있던 건 아니었어요. 그러다 중학교 때 변성기가 찾아왔고, 지금의 음색이 만들어졌죠.” 


연광철이 성악의 매력에 빠진 건 정말 우연이었다. 아버지 따라 산에 나무하러 갈 때면 늘 들고 다녔던 트랜지스터 라디오. 어느 날 그 라디오에서 생전 처음 듣는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로시니의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와 브람스의 <대학축전서곡>이었다. 음악이라면 다 좋았지만 좀 달랐다. 너무도 황홀했다. 하지만 그것이 성악인 줄은 몰랐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었다. 장남이었기에 하루라도 빨리 살림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빨리 사회에 나가 집안 형편에 보탬이 돼야 한다는 생각에 충주공고에 갔어요. 그런데 3학년 때 취업을 위해 준비하던 자격증 시험에 떨어졌죠.”


정신이 아득해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문득 노래가 떠올랐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 경연대회에서 <선구자>를 불러 1등할만큼 실력을 인정받지 않았던가. 무엇보다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이고, 비장의 무기인 ‘특별한 목소리’도 있었다. 
3학년 2학기, 늦깎이 음대 지망생은 노래를 배울 변변한 학원이 없어 피아노 학원에서 노래를 배웠다.

그렇게 몇 달 만에 속성으로 배운 노래로 청주대학교 음악교육과에 합격했다.

 

늘 가능성을 품고 사는 2등의 삶

 


 

어려운 집안 형편에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하고 싶은 것 해 봐라. 힘닿는 데까지 지원해 주겠다.”며 소를 팔아 등록금을 댔다. 피아노가 있는 연습실에서 마음껏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참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히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학 시절 수많은 콩쿠르에 참가했지만 늘 2등에 머물렀다.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지방대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그를 붙잡았다. 같은 학교에 다니던 한 선배는 그에게 1등을 하려면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억울함에 누구라도 붙잡고 긴 하소연을 할 성도 싶지 않은가? 하지만 연광철은 학교에 대한 콤플렉스나, 학력에 대한 열등감을 갖지 않았다. 


“2등이었기 때문에 고민이나 슬럼프가 있지는 않았어요. 2등은 늘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2등은 1등의 단점도 볼 수 있고, 3등의 장점도 볼 수 있죠. 고민이라면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 서양음악을 하고 있다는 것이 큰 질문이었어요. 결국 그런 시간들이 쌓여 오늘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더 넓은 세상을 바라봤다. 서양음악을 하려면 서양의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집안 사정이 걸렸다.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독일이나 이탈리아가 아닌, 한 달 생활비가 100달러인 불가리아 소피아 음대를 선택했다. 유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버지는 논을 팔았다.

 

 

작은 체구지만 거인처럼 노래하는 존재감


유학을 떠난 연광철은 불가리아 소피아 국립예술학교를 거쳐 베를린 국립음대를 졸업했다. 모든 과정이 쉽지 않았다. 베이스는 주로 왕이나 대제사장 같은 중후한 배역을 맡게 된다. 연출가 중에는 대놓고 키 큰 가수를 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연광철은 171cm의 단신에 동양인. 처음에는 키높이 구두를 신어 보기도 했지만 결국 그가 승부를 건 것은 실력이었다. 


“서양인이 보기에 키도, 눈도, 코도 작은 동양인이 출연하는 오페라가 어색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제가 노래를 다른 성악가보다 3~5배 정도 잘한다면 할 말이 없지 않겠어요?” 


연광철은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할 수 있는 것들에 시간을 투자했다. 캐스팅 제의를 받으면 악보는 물론 이야기의 배경과 인물 분석 등을 출연 3년 전부터 연구했다. 음악뿐만 아니라 그 나라 역사, 기후, 철학, 문학, 건축까지 섭렵하며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 오페라 가수에게 외모보다 더 중요하고, 기교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문화에 대한 이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독일인보다 더 정확한 독일어 발음을 구사하기 위해 밤낮을 잊고 연습했다. 습관처럼 저절로 그리 될 때까지. 덕분에 그의 독일어 발음은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정확하다고 평가받는다. 


“두 딸이 어릴 때 본 저에 대한 기억이 지하실에서 노래 연습하는 것 아니면 공연 마치고 와서 자던 모습밖에 없대요. 참 치열하게 살았어요.” 


1993년, 치열하게 준비해 온 연광철에게 드디어 전기가 찾아왔다.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 플라시도 도밍고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 도밍고는 ‘세계 오페라계의 떠오르는 보석’이라며 그를 극찬했다. 그 인연을 계기로 1995년엔 서울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플라시도 도밍고와 함께 무대에 올랐다. 


이후 연광철의 활약은 나열하기 힘들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빈 국립오페라, 파리 국립오페라, 뮌헨 바이에른 국립오페라 등 세계 명문 오페라극장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 오고 있다. 오페라 본고장인 독일에서도 비교대상이 없다고 말할 만큼 실력을 인정받고 있으며, 2011년 뉴욕 타임스는 ‘덩치는 작지만, 거인처럼 노래하는 존재감’이라고 그를 정의했다. 


연광철의 일정표는 2018년까지 해외 공연 일정으로 빼곡하다. 세계의 내로라하는 오페라단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연광철은 단역부터 시작해 오직 노력과 실력으로 보낸 시간을 잊지 않고 있다. 공연이 없을 때도 하루 두 시간의 연습은 빼놓지 않고 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그에게 연습은 몸에 밴 습관이나 다름없다.

 

 

작은 무대를 소중히 여긴 자에게 큰 무대가 열린다


서울대학교 성악과 교수인 연광철이 학생들에게 늘 하는 말이 있다. “작은 무대를 소중히 여기고, 뜻은 크게 갖되 작은 꿈을 꾸자. 그 작은 꿈을 하나씩 성취해가는 기쁨을 누리자. 그래야 더 큰 꿈을 꿀 수 있으니까. 나도 작은 꿈을 하나씩 이루다 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왔구나.” 
연광철은 늘 작은 꿈을 꾸었다. 청주대학교에 입학하는 것, 노래로 가족을 돌볼 수 있는 돈을 버는 것…… 그렇게 작은 꿈을 꾸고 하나씩 이루다 보니 오늘까지 왔다. 


그런 그가 자신처럼 작은 꿈을 키우는 이들에게 조금 더 다가왔다. JCC와 함께 국내에서 최초로 마스터클래스를 연 것이다. 연광철은 평소 재능과 실력이 있어도 환경과 조건 때문에 기회를 얻지 못하는 후배들을 걱정하고 안타까워했다. 세계적인 성악가인 그가 한국 성악 유망주들을 직접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큰 화제가 됐다. 


“JCC 관계자와 연주회 관련 이야기를 나누다 모체 기업인 재능교육이 교육 사업에 중점을 두고 있었기에 교육적 사업 일환으로 아이디어를 구상했어요. 한 번의 연주보다 지속성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성과가 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JCC와 함께해 나갈 생각입니다.” 


연광철의 마스터클래스는 참가자를 뽑는 단계부터 달랐다. 일반적으로 학력과 경력 위주의 참가 신청서에서 벗어나 참가자들의 지원 사유와 목표, 비전을 구체적으로 서술하는 방법을 택했다. 학연이나 지연 등의 특별한 자격 요건 없이 배움에 뜻이 있는 성악 전공생들을 위해 지원의 폭을 넓혀 놓은 것이다. 


100명 가까운 지원자가 몰렸다. 이 중 연광철이 직접 뽑은 10명이 이틀 동안 약 1시간 정도의 일대일 개인 지도를 받았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참가자들에게는 인생에서 더할 나위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참가자 중 한 명은 “누군가의 객관적인 조언이 많이 필요한 시기였는데 이번 교육을 통해 다시 한 번 나아갈 힘이 생겼다.”고 말했다. 


한국 성악가로서 가장 힘든 시기가 시작하는 단계임을 잘 알기에 연광철은 참가자들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애썼다. 그는 교육 내내 참가자의 노래를 들으며 발음, 발성, 표현, 숨 쉬는 요령까지 모든 것을 열성적으로 조언했다. 


“한 사람에게 배정된 시간이 짧아서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개개인의 문제점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소리에 고칠 점이 많은 참가자는 소리 부분을 주로 이야기했고, 소리에 문제가 적은 참가자는 음악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마스터클래스는 모든 수업을 마친 뒤 리허설을 거쳐 JCC 아트센터 콘서트홀에서 참가자 음악회 무대를 갖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첫 마스터클래스이기에 아쉬움도 컸을 것 같다. 
“다음 마스터클래스는 인원을 좀 더 줄이고, 시간을 좀 더 늘려서 더 심도 있는 방향으로 진행해 보고 싶습니다.” 

 

자신의 삶에 모델이 되어 보라

 


연광철에게는 늘 풀지 않은 짐 가방 두 개가 있다. 1년 중 300일 가까이 떠돌아 세계를 다니기 때문이다. 그는 마스터클래스를 무사히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그 가방을 들고 비행기에 올랐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세계의 관객들을 위해. 


“늙으면 과수원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꿈이에요. 화초를 키우고 꽃의 인생, 열매의 일생을 지켜보며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지금 생각으로는 70살까지는 건강이 허락하면 무대에 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세계무대를 누비지만 그 시원에는 풀냄새 흙냄새의 정겨움이 가득한 연광철다운 꿈이다. 끝으로 꿈을 키워 가는 우리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물었다. 


“꿈은 작게 가질수록 이뤄지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꿈들을 이뤄나갈 때, 그것들이 모여서 자신이 진짜 원하는 원대한 꿈도 이뤄진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앞에 주어진 과제들을 해냈을 때 다음 과제들이, 목표들이 기다리고 있겠지요. 개인적으로는 누군가를 모델로 삼고 사는 것보다는, 자신의 삶을 모델로 만들어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본 콘텐츠는 재능교육 웹진<맘대로키워라>에서 삼천지교 학부모님들을 위해 제공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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